지난 6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이 ‘보편적 낙태권’ 폐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미국 미시시피주 법은 임신 15주 이후의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있는데, 이 법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다고 판결한 겁니다. 이는 49년 전에 보편적 낙태권을 보장한 판례를 전면 뒤집은 것입니다. 연방대법원의 이 판결의 결과로 그동안 헌법으로 보장됐던 낙태권이 주 정부와 의회의 결정에 따라 존폐가 갈리게 될 예정입니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요? 3년 전인 2019년에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사실상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2021년부터 모자보건법 14조에 따라 임신 3개월 이전에 한해서는 의료시설에서 합법적으로 낙태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나 낙태죄를 대체할 대체입법은 현재까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입법 공백의 혼란은 오롯이 의료계와 임신중지를 희망하는 여성들의 몫이 되고 있죠.

미국 대법원의 결정으로 낙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지금, 한국의 의료계와 시민단체, 그리고 여성들은 낙태죄 입법 공백을 해소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여성의 몸’ 특집 마지막 편은 작금의 상황에 시의적절한 국내의 한 연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성의 몸을 둘러싼 재생산 정치, 그리고 유산유도약 도입에 대한 이야기에요.

*낙태라는 용어는 법 상 용어로 관련된 내용에 한해서만 사용. 그 외에는 중립적인 용어인 '임신중지'를 사용

‘미프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미프진’은 유산유도약인데요, 약물 복용을 통해 자연유산을 유도하는 약이에요. 수술 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안전한 임신중지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부터 미프진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기도 했어요. 현재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도입되어 사용 중이고, 전체 임신중지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도 계속 증가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미프진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수록 미프진의 유통은 함께 증가해왔다고 해요. 임신중지를 필요로 하는 개인들에게는 낙태 수술에 대한 접근이 어려울수록, 미프진은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약이 무분별하게 유통되면서, 여성들의 건강을 해치거나 임신중지가 안전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문제도 함께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 의식 하에서 2016년 국내에서도 ‘낙태죄 폐지’ 운동과 함께 ‘미프진 합법화’ 요구가 등장합니다. 2017년에는 국민청원을 통해 미프진 합법화를 요구했으며, 2020년에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에서 미프진 도입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국내에서 미프진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국내의 한 제약회사가 영국 제약사와 미프진에 대한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식약처에 품목허가를 신청했어요. 다만 승인 심사는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그러나 연구자는 국내에서 미프진의 도입이 이뤄지지 못한 이유가 단지 낙태가 불법이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그보다는 미프진이라는 ‘약’이 지니는 ‘자율성’이라는 특성에 논란의 핵심이 있다고 보았어요. 즉, 여성들이 직접 약을 복용하여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 되면, ‘성문란’, ‘생명경시풍조’, ‘오남용’의 문제가 우려된다는 반대의 담론이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것이 진짜 이유라고 주장합니다.

‘성문란’, ‘생명경시풍조’ 이런 문구가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여성의 피임약 복용과 관련해서 굉장히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문구니까요. 콘돔과 달리 피임약은 여성이 약의 복용을 통해 피임에 대한 주체적인 통제권을 지닌다는 ‘자율성’ 측면에서 유산유도약과 같은 맥락을 가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피임의 문제는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간에 자식의 숫자 혹은 터울을 조절하는 가족계획의 문제로서 다뤄져 왔습니다. 즉, 피임은 국가가 기혼여성에게 부여한 산아제한에 대한 책무의 실천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죠. 경구피임약(먹는 피임약)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1975년에 정부에서 발간한 <정확한 가족계획 방법의 이해를 위한 자습교본>에서는 경구피임약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안정성에 대해서도 임신보다 안전하다며 부작용에 대한 논란을 차단시키고 있죠. 그러나 1989년 정부의 가족계획 사업이 중단되자, 정부는 태도를 바꿉니다. ‘오남용’이 우려된다며 피임약 대중광고를 금지했고, 1995년에는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피임약에 대한 광고가 불가한 이유를 밝힙니다.

응급피임약의 도입과 관련된 사회적 논쟁도 살펴볼까요? 1998년 11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2년간, 응급피임약 보급에 대한 시범사업이 진행됐습니다. 이 시범사업으로 응급피임약과 관련한 사회적 논쟁이 촉발되었죠. 특히 응급피임약의 도입에서 제기된 쟁점은 성문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생명경시 풍조의 조장’, ‘무책임한 성관계’ 등의 문구가 등장하죠. 자, 이제 유산유도약 도입과 관련된 사회적 논쟁의 초점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눈치채셨나요?

• 여성과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임신중지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피임의 권리를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하죠. 한국의 피임 관련 정책 기조에는 미혼모 예방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데요, 이는 미혼 여성의 성적 실천 자체를 문제시하는 태도를 내포한 것 입니다. 여성의 성적 실천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지 않는 한 미프진과 같은 유산유도약이 도입 자체가 여성의 몸, 그리고 재생산에 대한 권리의 확장으로 이어지긴 어려울 거에요.

• 제도적인 변화도 필요합니다. 특히 임신은 배란-수정-착상이라는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이라서 현실적으로 어디까지가 피임이고 어디부터 임신중지인지 완벽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임신중지를 위해서 단순히 피임을 장려하는 게 아니라 확장된 출산조절의 맥락에서 여성에게 다양한 피임법과 임신중지법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접근 권한이 주어져야 해요. 그리고 이때 고민해야할 건 정부의 산아 계획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와 건강에 위해가 덜 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임신할 수 있는 몸을 지닌 여성에게 집중된 정치적, 제도적 압박이 중화되어야 합니다. 임신이라는 결과는 생물학적 이유로 여성의 몸으로 귀결되지만, 그 과정에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