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친화인증기업’이라고 들어봤니? 

남성 가장의 부양 지원 vs. 성평등한 일-가정 양립 지원

서론에서 저출생 해결을 위해 정부가 가족친화정책을 실시해 왔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적 노력에도 왜 현실적 괴리는 크게 느껴질까요? 다시 말해, 왜 일-가정 양립은 아직도 어렵고, 여전히 사람들은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지 않는 걸까요?

우리나라에는 사실 2가지 방향의 가족친화정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평등한 일-가정 양립을 위한, 성평등 의제로서의 가족친화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 가장 노동자의 부양을 돕는 가부장적 가족주의로서의 가족정책이죠. 딱 봐도 이 둘은 뭔가 상반된 것 같죠? 문제는 정책이 시행되어온 과정에서 이 둘이 혼재되어 가족친화정책의 목표와 가치가 뒤섞여 버렸다는 겁니다. 

노동자의 일, 가족, 개인생활을 지원하는 가족친화정책은 성평등 해결 차원에서 출발했습니다. 산업화 이후 남성 노동자를 상정한 기업의 고용체계 때문에 전통적 돌봄 책임자인 여성은 일과 가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요. 가족친화정책의 목표는 이러한 현실에 개입하여 남녀 모두가 성평등하게 일과 가족 돌봄을 균형있게 양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여성가족부가 처음 정책화 했는데요. 남녀평등 실현을 위한 주요 의제인 여성인력 개발을 위해 여성의 일-가정 양립과 가족친화적 근무여건 개선을 강조하며 가족친화정책 논의를 성평등 의제로 흡수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즉 가족친화정책의 목표는 성별화 된 일과 가족 역할을 성평등하게 바꾸는 것에 있었으며, ‘돌봄자’로서 노동자를 상정하고 돌봄과 직장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에 초점이 있었죠.

한편 2001년 이전에도 다른 의미의 가족정책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남성 부양자의 역할을 지원한 정책입니다. 1980년대 산업화 시기, 사회보장제도가 없어 가족이 그 역할을 전적으로 떠맡았을 때, 기업은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대가로 남성 노동자 가족의 부양자 역할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이 때의 가족정책은 철저히 전통적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기반하여, 남성 가장의 부양을 지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성평등 해결 차원에서 돌봄자의 일-가정 양립에 초점을 맞추었던 가족친화정책의 초점이 2000년대 중반,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범정부 차원으로 흡수되면서 부양자의 역할을 지원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 지점이 연구자가 지적한 문제의 핵심입니다. 성평등 이슈였던 것이 가족이슈로 탈바꿈하고, 남성 부양자를 지원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가족친화’라는 이름으로 재의미화 되면서, 가족친화정책의 목표가 성평등한 일-가정 양립에서 전통적 가족기능의 강화로 이동해버린 것이죠.

가족친화인증기업이라는 데, 현실은?

자 그럼 가족친화정책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았으니, 현재 국내 기업들은 어떤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저자는 시행하고 있는 가족친화정책 유형에 따라1,314개 기업/기관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후, 어떤 요인이 기업으로 하여금 그러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지 분석하였습니다. 참고로 돌봄 역할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는 유연근무, 육아휴직, 출산휴가, 보육비지원 등이 있으며, 부양 역할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는 자녀 학자금 지원, 가족휴양시설제도, 다자녀 가족수당 지원 등이 있습니다.

‘최소주의형’은 말 그대로 노동자의 가족과 관련하여 매우 적은 복지를 제공하는 기업입니다. 노동자의 가족 복지에는 매우 소극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절반을 차지할만큼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었어요. 주로 중소기업이 이 유형에 속했습니다. 

전통적 가족주의적 정책을 큰 변화없이 유지한 기업은 ‘부양중심형’ 유형에 속합니다. 전체 기업 중 17%정도를 차지했고, 대부분 지방의 작은 규모의 공공기관이 이 유형에 속했습니다. 주로 노동조합 요구에 따라 가족친화정책을 발전시킨 기업일수록 부양중심형이 될 가능성이 높았어요.

부양자 중심이 아닌 돌봄자 중심으로 가족정책을 전면 재설계하거나 그러한 프로그램을 도입한 기업은 ‘유연돌봄형’ 유형입니다. 유연돌봄형은 저자가 강조하는 성평등한 일-가정 양립과 가장 가까운 유형인데요, 안타깝게도 기업의 14%만이 이 유형에 속할정도로 가장 낮은 비율을 보였습니다. 기업내 여성비율이 높을수록 유연돌봄형일 확률이 높았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여성임원 비율은 가족친화정책 도입과 관련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는 여성의 상위직 진출이 확대되어도 기업의 정책수립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뜻인데, 가족친화정책의 수용이 여성의 의사결정 참여와 같은 직접적 영향력 행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여성인력 관리를 위한 기능적 필요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또한 정시퇴근이 가능한 기업일 수록 이 유형에 가까워졌는데요, 장시간 노동이 가부장제 가족주의에 기초한 관행임을 고려하면 납득가능한 결과죠.

마지막으로 남성 부양자를 지원하는 기존 가족정책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돌봄자 중심의 새로운 프로그램도 수용하는 ‘혼합형’ 유형도 있습니다. 주로 큰 공공기관이 이 유형에 속했죠.

자 이렇게 각각의 유형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살펴봤습니다. 그럼 이제 가장 궁금한 것! 가족친화인증제도는 이들 유형을 발전시키는 데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요? 우선, 인증기업일수록 최소주의형보다는 나머지 유형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효과가 일부 있었던 셈이죠. 다만, 특별히 유연돌봄형을 발전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책의 원래 의도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던거죠.

📌그럼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 많은 연구에서 저출생 해결을 위해 가족친화적 사회 분위기 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정부도 관련 정책을 적극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사회는 바람직한 가족 상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도 하지 않았었네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가족이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일과 가정을 평등하게 양립할 수 있는 가족일겁니다. 그리고 가족친화라는 용어는 그러한 가족 상에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돋는 것이어야 하겠죠. 바람직한 가족상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가족친화라는 용어의 재개념화가 필요해 보입니다.

• 근본적인 정책 재설계도 다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족친화인증제라는 정부차원의 압력은 기업으로 하여금 기업이 노동자의 가족을 지원하는 정책을 도입하도록 했지만, 기업이 돌봄 중심으로 가족친화정책을 재설계 하는 데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돌봄과 노동은 양자택일 대상이 아닌, 함께 가져야 하는 권리입니다. 이제 남성 가장 노동자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남녀 모두 돌봄자라는 것을 전제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