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노동자, ‘배달라이더’말고 ‘데이터라벨러’도 있어요!

인간이 인공지능(AI)을 위해 일한다고?

AI의 발전으로 인간의 일은 줄어들 줄 알았건만…아이러니하게도 AI는 인간의 노동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라벨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미지, 음성, 동영상 등 다양한 유형의 데이터를 AI가 쉽게 학습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업무를 지칭하는데요, 이를 수행하는 노동자를 ‘데이터라벨러’라고 부릅니다. 데이터라벨링은 방대한 업무량과 단순 반복작업이라는 특성 때문에, 전문인력을 고용하는 형태가 아닌 온라인 플랫폼에서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업무를 요청하는 게시물이 올라오면 👉 원하는 사람들이 해당 업무에 참여하고 👉 전체 작업량이 완료되면 검수자가 검수를 진행하고 👉 검수가 끝나면 자신이 진행한 업무량 만큼의 보수를 지급 받는거죠. 단순 노동,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한다는 의미에서 데이터라벨링은 ‘미세노동(micro work)’이라고도 불립니다. 익명의 다수가 불특정 기간동안 업무를 위해 모였다 흩어짐을 반복하고, 모든 과정이 온라인상에서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탓에 그동안 데이터라벨링은 비가시화 되어왔어요. 그러나 같은 플랫폼 노동이라 할 지라도, 일은 온라인에서 구하되 작업은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노동(배달, 물류 등)과 크라우드 노동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크라우드소싱 플랫폼에서 일어나는 일

연구에서는 청년 데이터라벨러들을 섭외하여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온라인 노동이라는 특성때문에 IT에 친숙한 20-30대 청년층이 주로 크라우드소싱 플랫폼에 진입합니다. 휴학생, 취업준비생, 구직자, 주부 등 배경은 각자 달랐지만, 처음에는 대부분 전업보다는 부업을 위해 데이터라벨링을 선택했어요. 임시적, 단기적인 부수입을 얻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시공간적 제약이 없는 데이터라벨링은 최고의 선택지였죠. 

💡 1단계: 공정성 인식 & 신뢰 형성

업무의 자율성이 담보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최저시급도 보장되지 않는 낮은 보상에도 데이터라벨링을 공정한 노동으로 평가했어요. 사회생활로 인한 쓸데없는 감정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 일하고 내가 한 만큼만의 보상을 가져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투명하고 즉각적인 금전적 보상 역시 청년 크라우드 노동자들을 플랫폼에 머무르게 하는 이유였습니다. 진입 초기에 플랫폼에 대한 불확실한 태도를 보였던 이들도 금세 플랫폼에 대한 신뢰를 형성할 수 있었죠.

💡 2단계: 노동의 게임화

한편, 크라우드소싱 플랫폼의 독특한 노동환경은 ‘노동의 게임화’라는 흥미로운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플랫폼에 대한 공정성 인식과 신뢰를 형성한 참여자들은 전략적 행위자로서 플랫폼 노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수동적으로 주어진 작업을 완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골라서 했죠. 예를 들어 가성비가 좋은 작업을 선점하기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하거나, 일부 참여자들은 쉬운 일을 빠르게 쳐내는 것에 재미를 느껴 그런 성향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남들이 뺏어가기 전에 선점하는 데에서 작업자들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이 발생하는데, 여기에서 일의 재미를 찾는다는 인터뷰 참여자들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단가가 낮기 때문에 보상보다는 경쟁이 낳는 재미가 이들의 노동 만족도를 충족시켜주었던거죠. 

💡3단계: 플랫폼 종속화

부수입을 위해 가볍게 시작했지만 적극적 행위자 된 일부 노동자들은 플랫폼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플랫폼에 접속해 작업 게시물을 확인하는게 습관이 되거나, 자투리 시간에 부업으로 데이터라벨링을 했던 것이 나중에는 데이터라벨링을 위해 시간을 일부러 비워두게 되었죠. 심할 경우 어떤 이들은 나중에는 전업처럼 몰입하게 되어 데이터라벨링을 최우선 일처럼 여기며 의도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주객전도가 된 것이죠. 저자는 이를 익명 크라우드 경쟁의 양면성이라고 지적합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자유롭게 진입, 이탈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경쟁을 촉매로 게임화 과정을 거친 노동자들을 플랫폼에 종속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요.

📌4차 산업혁명과 플랫폼 노동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그동안 비가시화되었던 크라우드 노동자와 이들이 처한 노동환경이 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어요. 단순반복작업인 이들의 노동은 ‘미세노동’이라고 불린다고 했죠. 현재 정부에서는 청년실업 대책의 일환으로 '플랫폼 종사자 특화훈련(자세히 보기)' 이라는 정책 하에 데이터라벨링 교육을 국비로 지원하며 청년 데이터라벨러를 적극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노동은 오래하면 숙련이 되는 데 반해 업무의 수준은 올라가지 않아 경력이 될 수 없어요. 경력이 형성되기 어려운 일자리로 청년들을 무작위로 진입시키는 이 정책이 장기적 관점에서 일자리 문제 해소를 위한 올바른 정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플랫폼 노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좀 더 세심한 정책이 고려될 필요가 있겠어요.

• 이들에 대한 학술적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저자는 플랫폼 노동에 대한 연구가 배달, 물류 등 긱 노동자에게만 치중되어 있고, 크라우드 노동자에 대한 국내 연구는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크라우드 소싱 플랫폼 가입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요, 앞으로도 청년 노동자의 유입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크라우드 노동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시급해보입니다. 참고로 저자는 2020년 크라우드 노동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이들이 익명과 비대면을 기반으로 노동함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방식을 통해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언급합니다. 플랫폼 노동의 이질성을 고려한 확장된 연구가 늘어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