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 제도의 위대한 목표

아이를 가질 예정이거나, 이미 아이가 있는 부부는 엄청난 고민에 빠집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가! 모두가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였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죠. 이들은 곧 육아휴직이나 유연근무제 같은 제도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나라는 저출생에 대한 대안으로 여성가족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등의 정부부처에서 정말 많은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결국 목표는 다 하나로 귀결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로서, 부모로서 제대로 역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지난 2023년 3월, 육아휴직급여액을 최대 300만원으로 올리는 일명 ‘슈퍼맨이 돌아왔다’ 법안이 발의되었던 것만 봐도 이 사안에 대한 시급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쓰지 않는 원인으로 수입감소(40.7%)를 꼽았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육아휴직을 사용하게 할 유인책을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메트로신문. 2023.04.06. "[뒤엉킨 육아휴직제2] 아빠의 육아휴직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도록"

아빠들의 일-가정 정책 사용률과 육아참여율, 언제나 비례하나?

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가정이 숨어있어요. 바로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가사노동과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거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현실은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가장 성평등하다고 불리는 북유럽 국가에서도 가정의 일은 여전히 여성에게 과중되어 있거든요. 즉, 남성의 가사노동 및 육아 참여 시간이 계속 늘어난다기보다는 정체되어 있다는 건데요 (폴리버리 '가사노동? 분담은 제대로 한 것 같은데...' 참고).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 ‘돌봄은 여성의 문제야’

💡 ‘난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데… 다른 동료들의 눈치가 보여’

여기 좋은 남편이자 아빠가 되고 싶어하는 사원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1개월 뒤에 첫째 아이가 세상 빛을 볼 것이라고도요. 이 사람은 과연 마음 놓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러기는 어려울 거예요.

첫째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커리어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아빠가 무조건 육아휴직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이상적 노동자(ideal worker)’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상적 노동자 규범은 (일의 효율과는 상관없이) 오래 일하고, 관리자의 눈에 보이는 데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좋은 노동자라고 인식되는 규범을 말하는데요. 육아휴직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조건 이 규범에 반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육아휴직이 남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한국 아빠들에게 물어본 결과, 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에 돌아갔을 때 미혼 동기나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은 유자녀 동기에 비해 진급이 누락되거나 해고 대상이 될까봐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고요(메르토신문 박태홍 2023).

둘째로, 주변 남자 동료들의 생각이 중요할 수 있어요. 예컨대 내가 회사에서 교류하는 대부분의 동료가 ‘남자라면 가정 일은 아내에게 맡겨두고 돈 벌어다 주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해봅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육아휴직을 쓴다면 동료들이 나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길 수 있겠죠. 이런 환경에서는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를 사용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아내와 평등하게 가사노동을 분배할 거라 보기는 어렵겠죠. 이번에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동료들이 ‘진정한 남자라면 가정을 위해 육아를 함께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남성 직원들이 관련 제도를 잘 사용하는 분위기라면,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제도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렇다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한 남성이 가정에서 더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이 조건을 파헤치기 위해 연구자들은 독창적인 서베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젊은 미혼 무자녀 남성을 대상으로, 일-가정 양립 지원 제도가 존재한다고 했을 때, 본인의 젠더 이데올로기(전통적 vs. 진보적)와 동료집단에서의 남성성 규범(전통적 vs. 진보적)이 가정 내 평등한 가사분담을 추구할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 본인의 젠더 이데올로기가 진보적일 때 → 효과 x

대부분의 남성들은 진보적인 젠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엄마가 직장을 가져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죠.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러한 지향을 가진 것만으로는 육아휴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배우자와 가사노동을 평등하게 분배할 가능성을 높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 남성 동료들이 진보적인 남성성 규범을 갖고 있을 때 → 효과 o

한편 같이 일하는 동료 남성들이 전통적인 남성성을 지향한다면,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것이 가정 내 분업을 평등하게 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만 단축근무 등을 통해 육아에 참여하는 것이 어떠한 낙인을 받을 수 있겠다는 위협을 느끼거든요. 또, 아빠 본인이 일-가정 양립 지원 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일도 하면서 자녀 돌봄에 책임이 있다고 바라볼 가능성이 있어요. 반면 남성성 규범이 젠더 평등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는 일-가정 양립을 위한 지원 제도를 통해 가정에 기여하고자 하는 정도가 높아진다고 해요.

📌그럼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 젠더 이데올로기가 진보적인 남성이 배우자와의 관계도 평등하게 그리기는 합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성의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가정 내 젠더 평등을 이루는 데에는 별 효과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언뜻 비관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일-가정 지원 제도가 본래 목표한 가정 내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것은 바로 해당 조직의 규범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제도를 만들어 놓는 것만으로는, 그리고 제도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정체된 성평등이라는 길을 뚫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가정의 일이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 있도록, 진보적인 남성성 규범이 조직 내에 퍼질 수 있도록 사내 교육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돌보는 남성성(폴리버리 '성별 중립적 분담에도 계속되는 가사노동 불평등' 참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젠더 평등이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