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은 숙련이 필요없는 여성의 본질적 영역일까?

너무나도 (남성)주관적인 숙련의 기준

생산성과 직결되는 숙련은 노동시장에서 임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숙련이 필요한 직업일수록 해당 직업에 대한 가치도 높게 평가되고요. 숙련의 판단은 언뜻 객관적인 것 같지만,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주관적인 사회적 위계에 기반하여 구성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돌봄의 무급화 및 비숙련화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공모한 의도된 결과라고 강조해요. 높은 시장 생산성을 위해 육아와 같은 일상 영역을 여성에게 무급으로 떠넘기고픈 자본주의와 남성에 대한 우위를 인정하고픈 가부장제가 결합하여 사적영역은 노동이 아닌 여성의 본질이라는 믿음을 형성시켜왔다는 건데요. 그래서 그동안의 숙련 논의는 오로지 노동으로 인정받는 공적영역만을 대상으로 하여 남성 노동자 내부에서만 이루어져왔으며, 여성은 당연하게 배제되어 왔습니다. 숙련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남성중심적 노동 개념만이 기준이 되었죠. 따라서 이에 부합되지 않는 돌봄은 지금까지도 숙련이 필요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고보면 돌봄도 전문 작업지식이 필요한 숙련노동

그럼 돌봄이 진짜 숙련직인지 확인해봅시다. 숙련을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작업지식과 전문화입니다.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작업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작업지식이 쌓여 일에 능숙해진 노동자가 일을 더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그 업무는 숙련이 필요한 업무라고 할 수 있겠죠. 육아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저자는 돌봄이 방대한 양의 작업지식에 기반한 전문성이 높은 숙련직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아이를 양육하는 한 연구참여자는 자신은 육아가 익숙하지만, 자신의 처형은 육아가 처음이라 많이 힘들어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육아에는 먹이기, 재우기, 배변훈련, 놀아주기, 훈육, 교육관리 등 광범위한 노동이 포함되기 때문에 많은 양의 작업지식을 필요로 하는데요. 이미 첫째아이를 통해 작업지식을 쌓은 참여자는 매 순간 돌발상황이 발생하는 육아에 무기력해지지 않고 노련하게 대응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한, 참여자들은 책, 인터넷, 어플, SNS 등을 통해 육아 노하우를 터득하고자 시간을 할애하여 노력했는데요, 어떤 참여자는 육아를 제대로 하려면 교육학 박사만큼의 전문성이 필요한 것 같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많은 지식과 숙련이 요구되었죠.

한편, 육아 뿐 아니라 아이를 위한 요리, 빨래, 청소와 같은 비양육적 노동도 넓은 의미에서는 돌봄노동에 포함됩니다. 비양육적 돌봄에서도 작업지식에 기반한 숙련도의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요리는 레시피 만으로 극복되지 않았는데요. 간 맞추기, 신선한 재료를 보는 눈, 맛에 대한 감각 등 숙련에 기반한 노하우가 중요했으며, 재료를 낭비없이 어떻게 활용할 지 계획하는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빨래 역시 세탁기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탁물 분류, 세탁기 코드 작동법에 따른 세제 투입량 등의 구체적인 작업지식을 필요로 했고, 청소에서도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청소를 위한 청소 순서 작업계획 능력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은폐되는 전문성

돌봄에 전문지식과 숙련이 필요하다는 건 이제 알겠어요. 그럼 왜 돌봄노동의 전문성은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요? 이는 돌봄노동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저자는 설명합니다.

💡 소외된 사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노동

집이라는 사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의 특성 때문에, 돌봄은 공적으로 말해질 기회가 적습니다. 노동의 내용이 타인과 공유되지 않으면 노동과정에서 요구되는 전문지식도 드러나지 않고, 노동 당사자들의 조직화도 일어나기 힘들어요. 특히 남성은 집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해 회사에서 거의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의 돌봄은 더욱 공유되기 어렵죠. 그래서인지 참여자들은 돌봄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것이 엄연한 숙련‘노동’이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사회적 통념으로 인한 노동 당사자의 노동가치 평가절하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체계적 노력으로 습득한 자신의 작업지식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으로 치부했어요. 노동과정에서 습득된 구체적 작업지식에 기반한 숙련이었음에도 돌봄은 비숙련 노동이라는 사회적 통념때문에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거죠. 돌봄에 대해 가장 많은 전문지식을 보유한 당사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평가절하하기 때문에 숙련노동으로서 돌봄의 노동가치는 평가받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있었습니다.

💡 돌봄노동의 전문화에서 발생하는 모순

앞서 보았듯이, 돌봄은 재우기, 먹이기, 청소하기 등 여러 세부노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돌봄 노동자는 일을 하면서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이 지나면 전문 작업지식이 축적되어 모든 세부노동에 대해 상당한 숙련에 도달하는데요. 이렇게 전문화된 돌봄노동은 여성의 독박육아를 합리화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육아는 대체로 엄마가 맡는 경향이 있죠? 여성은 초기 육아과정에서 상당한 작업지식을 축적하게 되는데, 나중에 배우자와 육아를 분담할 때 작업지식을 모두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겨 차라리 혼자 하는 게 더 효율적인 모순이 발생하는 겁니다. 또한, ‘애 낮잠은 언제 재워야 하고, 애가 잘 때 빨리 청소를 해야 하고, 젖병은 언제 소독해야 하고…’ 돌봄을 수행하려면 각각의 세부노동을 잘 이해하고, 세부노동들이 조화롭게 수행될 수 있도록 종합적 계획도 세워야 하는데, 그래서 오히려 한 명이 관리하는 게 더 효율적인 게 되어버려요. 이는 궁극적으로 돌봄을 여성의 일로 더욱 본질화하여 노동의 전문성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 돌봄노동 가치의 재평가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가장 시급한 건 돌봄의 구체적인 노동과정을 학술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세부노동을 돌봄이라는 포괄적 범주로 이해하면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워져요. 돌봄에는 먹이기, 재우기, 놀아주기 등 다양한 노동과 나아가 비양육적 요소인 요리, 빨래, 청소 등도 포함되어 있어요. 애를 보는 것(양육)은 돌봄의 여러 요소 중 일부분에 불과한데, 세부노동들이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하게 축소되면 돌봄은 마치 애만 잘 보면 되는 것 (즉, 무급이어도 되는 것)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돌봄의 비숙련 통념은 공적영역에서의 유급 돌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요. 돌봄 일자리가 비숙련 저임금 노동으로 제도화되고 있는 만큼 유급 숙련노동으로서 돌봄노동이 재평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한편, 돌봄에 대한 성평등한 분담은 초기 육아과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쪽이 먼저 돌봄노동을 수행할 경우, 노동의 전문화때문에 분담보다 혼자 하는 게 더 효율적인게 되어버리니까요.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은 아직까지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어 아무래도 여성이 혼자 초기 육아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데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남성도 초기 돌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돌봄노동의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해요. 공적영역에서 노동의 경험이 공유될 수 있어야 돌봄을 수행하는 당사자들도 자신의 육아가 엄연한 숙련노동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노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돌봄을 수행하더라도 말할 기회가 더 적은 남성에 좀 더 친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