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강간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을까요?🤔 

2021년에 발생한 강간 사건 5,263건 중 중 남성 피해자는 40명, 전체 피해자의 단 0.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통계청,2021). 통계적으로 강간죄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인 경우가 많지만, 당연히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혹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나요?

사실 한국사회에서 남성이 강간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인정받은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2012년 형법개정을 통해 강간죄의 객체가 ‘사람’으로 규정됐죠. 개정 전까지 강간죄의 객체는 ‘부녀’로 한정되어 있었어요. 즉, 2012년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남성은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 형법 제297조(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부녀’에서 ‘사람’으로 개정한 것처럼, 법은 사회 일반의 법감정에 따라 변화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고정적 성역할에 대한 문제제기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법에 반영된 사례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러한 법 개정만으로 법의 성편향성을 모두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법이 어떻게 적용되느냐, 즉 판사가 강간사건을 판단할 때 적용하는 법리 역시 변화해야 하죠.

오늘 폴리버리 레터에서는 사법 영역에서 ‘강간죄’의 판단 기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고, 앞으로의 변화 방향을 생각해보기로 해요. 

'피해자다움'이라는 편향된 기준

보통의 형사사건은 ‘증거재판주의’를 취합니다. 범죄사실이 인정되려면,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것이죠. 그런데 일반적인 범죄와 달리 성폭력 범죄의 경우, 당사자 이외의 목격자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피해사실을 증명해야 하죠. 따라서 대부분의 성폭력범죄는 당사자의 진술이 유죄판단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원은 어떤 기준으로 당사자의 진술을 판단해왔을까요?

💡 당신은 성폭력 '피해자'답지 않네요

종전 판례에서는 피해자에게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면서 피해자의 진술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종전 우리나라의 강간죄 판례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강간 후 피해자가 수사기관이나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거나 가해자를 다시 만나는 등의 행위를 했다면, 피해자답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죠(대법원 1992. 9. 1. 92도1405판결 및 대법원 1990. 9. 28. 선고 90도1562판결).

혹은 피해자가 피고인과 함께 숙박업소에 함께 들어갔다는 사정만으로 이미 성관계에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판단한 경우도 있었습니다(대법원 2001, 10. 30. 선고 2001도4462 판결 등). 피해자가 도움요청을 했더라도, 그 도움요청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대전지방법원 1995. 2. 22. 선고 94고합566판결). 

이러한 사례들은 여성의 입장 및 체험, 고통을 배제하고 남성과 가해자 중심적으로 구성됐다는 비판을 받게 됐죠.

💡 법리와 현실의 괴리, 그리고 변화

한국성폭력상담소(2019)에 따르면 성폭력은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많습니다. 피해 이후 상당한 육체적 및 심리적 스트레스를 경험하기도 하죠(서울여성노동자회, 2016). 즉, 강간과 같은 성폭력 피해자는 일반적인 범죄와 다른 특성을 가질 수 있어요. 신고 후 기존 관계에 미칠영향,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이른바 ‘피해자다움의 부재’를 확인하는 남성 중심적 법리는 이러한 현실을 포섭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법감정의 변화에 따라 법원의 판단 역시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2009년, 아내에 대한 강제추행치상죄를 인정한 판결이 등장했고(부산지방법원 2009. 1. 16. 선고 2008고합 808판결), 2013년에는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강제적 성관계를 맺은 경우라면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판결이 내려졌죠(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도14788 전원합의체 판결). 그리고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법원에 등장했습니다(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74702판결).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과 성별의 차이, 그리고 피해자의 연령 및 행위자와 피해자의 관계 등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인지감수성'을 고려한 판결이 필요한 이유 

일각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재판을 전개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역차별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형사사건에서의 사실인정은, 민사소송보다 훨씬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고,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넘는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기 때문인데요. ‘강간죄’의 판단에서 엄격한 사실판단과 정교한 논증이 아닌, ‘감수성’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통해 피해자의 진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기준은 성폭력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가 반영된 것입니다. 형법상 강간죄의 피해자에 ‘남성’이 포섭된 것처럼, 사법영역에서의 성평등을 추구하기 위한 변화인 것이죠.

만약 절도범죄의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면, 피해자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요? 또한 살인죄의 피해자가 ‘피해자다워’야 한다면, 어떻게 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강력범죄이자 피해자의 약 98%가 여성인 강간죄, 그리고 대다수의 피해자가 여성인 성폭력범죄에서 유독 ‘피해자다움’이라는 편향된 기준으로 판단이 이루어져왔던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기준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피해자는 강간죄를 입증하기 위해 ‘충분한 저항’을 했다는 것까지 스스로 입증해야 했습니다. 실제 CCTV를 보았을 때 모텔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겁을 먹었다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간에 대한 무죄판결이 내려진 사례가 있었고요(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 2017. 11. 15. 선고 2017고합34 판결).

하지만 성폭력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 우월한 지위나 신체를 활용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고, 성폭력 상황에서 피해자는 공포로 인해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긴장성 부동화(tonic immobility)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가 인정되지 않는 상황, 아마 법이 추구하는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모든 젠더(gender)를 존중하는 법으로 나아가려면 

법은 시대가 가진 통상적인 법감정과 현실을 반영합니다. ‘강간 피해자는 마땅히 그러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통념이 현실과 다르다는 점, 강간죄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성인지 감수성’의 법리적 타당성은 긍정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강간죄 사건에서 피해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구체적 요소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단순히 피해자의 말만 듣자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남성중심적 법리를 탈피하기 위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성인지 감수성’ 법리의 목적은 모든 젠더(gender)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젠더에 대한 사회의 존중과 인정이 선행되어야겠죠? 그동안 강간죄의 객체, 법리가 변화해 온 것처럼,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법리가 구체적으로 확립되어 가며 우리 사회의 젠더의식 역시 변화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