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이 반드시 일하는 여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폴리버리 레터 기억나시나요? 과로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육아휴직을 만회하기 위해 복직 후 오히려 자신을 혹사시키게 된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육아휴직이라는 대표적 일-가정 양립정책이 만병통치약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정책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정책이 하나 더 있죠! 혹시 짐작이 가시나요? 네, 이번 폴리버리 레터에서 다룰 일-가정 양립 정책은 바로 유연근무제입니다.

유연근무제를 한번 상상해봅시다.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면… 집에서 근무를 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근무할 수 있다면… 음, 유연근무를 사용하는 여성들은 아침에 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수도 있고, 일을 그만두지 않고도 가사노동을 할 수 있으니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에 용이할 것 같기도 하네요. 이처럼 유연근무는 확실히 일하는 여성으로 하여금 일과 가정의 충돌을 덜 경험하게 해주고 경력단절을 방지하는 순기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 다른 예측도 가능한데요. 일하는 여성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집안일은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되려 유지 및 강화되진 않을까요?

이처럼 유연근무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예측이 모두 가능한 가운데, 영국의 한 연구자는 어떤 유연근무제를 사용하느냐, 또 돈을 많이 주는 직종에서 일하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유연근무의 시행이 성평등한 돌봄의 가능성에 미치는 영향을 다양한 각도로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연근무제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유연근무제는 일하는 시간이나 장소가 유연한 근무제도를 통칭하는 넓은 용어로, 시차출퇴근제, 선택근무제, 재택근무제 등의 다양한 근무방식을 모두 포괄합니다. 유연근무제의 종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하니, 각각의 개념을 각각 알아볼 필요가 있겠죠?

💡 시차출퇴근제의 긍정적 효과

유연근무제 중에서도 비교적 덜 유연한 유형에 해당하는 시차출퇴근제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시차출퇴근제를 사용한 여성은 가사노동과 육아에 더 적은 시간을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어요. 연구자는 이러한 결과를 시차출퇴근제가 그들의 남성파트너의 가사노동과 육아 참여를 증가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시차출퇴근제의 사용은 남녀간 더 평등한 돌봄 분업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계가 특히 저소득 직종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두고, 육아와 가사노동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한 저소득 직종에서 유연근무제의 긍정적 효과가 특히 잘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일과 가정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달라지는 이야기

그러나 일과 가정의 경계를 흐릴 가능성이 더 높은 방식인 선택근무제와 재택근무의 경우, 다소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과 가정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여성의 가사노동과 육아 시간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불평등한 돌봄 분업을 초래하는 경향이 나타난 건데요. 같은 재택근무제를 사용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성별규범이 여성은 집안일을, 남성은 일을 선택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근무나 재택근무시, 저소득 직종에 종사하는 남성 파트너는 고소득 직종의 남성 파트너보다는 가사노동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저자들은 이를 고소득 직종의 아빠들일수록 더 일에 헌신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집에서 가사노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일을 더 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 유연근무제 역시 일-가정 양립의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습니다. 일과 가정의 경계가 흐려졌을 때, 남성은 일을, 여성은 가정을 택하는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오히려 돌봄 불평등이 커지는 경향을 보였는데요. 이는 “남성은 일, 여성은 가족”이라는 성별 규범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상적인 노동자는 남성의 모습을, 이상적인 부모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폴리버리 구독자분들이라면 이제는 너무 익숙한 말이겠지만, 문화적 규범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일-가정 양립 정책이 성평등한 사회로 이어지진 않을 거예요. 따라서 이상적인 노동자와 성역할 규범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사실 이 연구는 현실에 적용가능한 방향성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연근무제는 적어도 저소득 직종에 종사하는 부부에게는 성평등한 돌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유연근무제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모두에게 주어진 것 같진 않습니다. 주로 고소득 직종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에 가깝죠. 이러한 상황에서 본 연구는 저소득 직종에 유연근무 권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 무엇보다도 본 연구는 유연근무제라는 일-가정 양립 정책을 세분화해서 분석할 필요성을 시사합니다. 유연근무제 방식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직종에 따라 정책의 효과가 달라지는 만큼 다차원적인 시각으로 유연근무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여요. 그러니 정책입안자들과 연구자들은 유연근무제를 단일하게 가정하거나, 그 효과를 뭉뚱그리지 말고, 다층적인 분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