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청년세대의 남녀는 ‘젠더 갈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갈등적 관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관련 담론이 작년 대선에서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호명되면서,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까지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의 근원을 언론과 정치권은 청년 남성이 ‘공정’을 최고의 가치로 지향하는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어요. 풀어서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성차별이 사라졌음에도 여성에게 유리한 제도와 정책이 과잉되어 있어, ‘공정’한 경쟁 질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특히 청년 남성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거예요. 

지난 폴리버리 레터에서는 청년 남성이 결코 단일한 젠더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논문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평등 정책이나 페미니즘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청년 남성이 다수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공정한 절차’속에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성과를 내고 이를 보상받아야 ‘공정한 것’이라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생각 때문이었죠. 그렇다면, 정말 ‘능력주의’는 공정과 평등을 보장해주는 최선의 선택일까요?

1)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은 현실에 없다

국립국어원의 정의에 따르면 ‘능력주의’란 “학벌, 연고 따위와 관계없이 본인의 능력만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태도”라는 뜻입니다. 능력주의의 기원을 따져보면 근대 사회계약론에 따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로서 획득한 재화와 물질은 정의로운 분배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어요. 따라서 개인이 자원을 획득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그 개인이 패배했기 때문이며 그런 개인을 사회가 돌봐주는 것은 동정에 기반한 시혜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이때, 애초에 능력주의가 상정한 ‘개인’의 개념은 ‘남성인 개인’을 의미했습니다. 즉 남성은 인간으로, 여성은 ‘여성’으로 포함되는 것을 의미했어요. 여성은 오로지 임신과 출산이라는 신체적 기능을 지닌 개인으로 파악되면서, ‘돌봄’에 가장 일차적인 책임이 부여된 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죠. 남성이 홀로 가정의 생계를 부양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여성도 능력주의적 성취의 주체로서 바라보는 현재에도, 거의 모든 국가에서 여성은 여전히 가정 내 돌봄의 일차적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은 어떤 나라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는지 등에 의해 달라집니다. 각자 타고난 재능 또한 개인의 선택보다는 운에 가깝습니다. 노력은 어떨까요? 마이클 조던과 마이클 조던과 같은 팀의 후보선수가 선수 중 누가 노력을 더 많이했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요? 즉,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말 할 수 있는 개인은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렇듯 능력주의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도, 그런 개인의 완벽한 소유로써 ‘능력과 노력’도 현실에 실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사회계약론에 기반한 능력주의가 여성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공정을 보장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2) 능력의 차이가 사라져도 차별은 여전하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여성들의 대입 진학률이 꾸준히 증가했고, 2009년부터는 통계적으로 남성을 추월했어요. 기업들이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도입하면서 차별이 완화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나오고 있고, 중립적인 평가 시스템이라고 여겨지는 국가고시 합격률에서 성별 격차는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여성의 능력주의적 성취가 생애 전반에서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거의 모든 연구에서 여성과 남성의 능력의 차이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 이유는 노동시장의 성차별적 구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유리천장의 문제뿐만 아니라, 조직 내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이 제한되는 유리벽 문제, 여성의 직군이 저임금의 대인서비스와 돌봄 노동에 편향되어 고착화되는 핑크컬러 게토 문제 등을 떠올려 볼 수 있어요. 단지 능력주의의 오작동일까요? 한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능력주의를 추구하는 조직에서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는데요, 이는 의사결정자들이 스스로를 편견 없는 사람이라고 자임할 때 오히려 편견을 표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해요. 

3) 성공한 여성은 성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개천에서 용난다’와 같은 자수성가를 격려하는 형태보다는,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식의 승자독식의 형태에 가깝습니다. 불평등을 자연적 질서의 결과로서 인식하고, 평등을 위한 노력은 어떠한 형태도 부정하는 심적 논리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확산되었어요. 능력과 업적에 따른 성과급제, 노동과 연계된 복지 정책과 같이 시장 질서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정당한 분배 원리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를 이끌어낸 것이죠.

이런 시장의 논리에서 여성의 성평등 비전은 구매력에 맞춰집니다. 여성으로 하여금 개인적 삶에 초점을 두고, 자기표현과 행위 능력을 소비자 역량으로서 표현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경제적 능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이런 식의 페미니즘은 ‘김치녀’와 같은 공격을, 한편으로는 여성간의 경쟁 구도인 '여적여'와 같은 표현을 양산하기도 했어요. 여성의 취약한 존재 지위는 단지 시장 경쟁을 통해 경제적 능력을 확보한다고 해결될 수 없으며,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견고한 젠더 위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 젠더 관계의 변화에 따른 위기와 좌절의 경험을 남성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 사회 공정성 인식에서 학력, 기업 규모, 계층 등에 따른 소득 격차보다 성별에 따른 격차를 정당하다고 바라보는 인식이 청년 남성에게서 압도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며, 청년 여성과의 인식 격차도 두드러진다고 해요.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적 경쟁의 고도화가 남성이 홀로 생계를 부양하기 어려운 경제 구조적 변화와 맞물려 진행되었고, 특히 그 변화의 직격탄을 청년 세대가 맞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삶의 불안정성이 커진 것은 남성만이 아니라 남녀 모두라는 점을 상기해야겠습니다.
• 단순히 여성을 ‘우대하는’ 조치로 간주되는 정부의 여러 성평등 정책들에 대한 접근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정책들을 결과적 평등의 관점에서 권력과 특권을 시혜적으로 분배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기회의 평등을 위배한다는 논쟁이 필연적으로 등장해 경합 구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부의 적극적 성평등 정책이 과거의 차별에 대한 보상의 차원이 아닌, 현행 제도와 의사결정자가 가지고 있는 젠더 편견이나 몰이해로 인한 부정적 영향력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