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

여성할당제=역차별? 그게 원래 의도는 말이죠…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여성 유권자를 누구보다 잘 대변할 수 있는 여성 정치인의 존재와 역할이 필수입니다. 아무리 좋은 남성 정치인이라도 여성 유권자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죠. 비례대표 여성할당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가장 많은 득표를 받은 후보자만 당선되는 승자독식 방식의 선거제도에서 비례대표제는 정치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선거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한 사회적 소수자에게도 입법 및 정책활동의 기회를 줄 수 있으니까요. 남성 위주 국회라는 견고한 구조를 깨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례대표제를 통해 인위적으로 여성의원의 수를 늘리는 것이 분명 필요해보였고,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

자 그럼, 비례대표 여성할당제가 시행된지 2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1. 여성 정치인의 수는 증가했는가? (단기적 목표, 양적개선 차원)
2. 여성 정치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성평등한 정책적 개선이 함께 이루어졌는가? (궁극적 목표, 질적개선 차원)

즉, 여성의의원의 양적확대에만 그쳤는가, 아니면 여성의원의 양적확대가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냈는가를 물음으로써 여성할당제를 평가해볼 수 있는데요. 앞서 OECD 여성 정치인 비율 순위를 보면 작금의 현실은 1번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아 보입니다. 2번은 말할 것도 없죠. 스토킹 처벌법은 20년만에 겨우 국회를 통과했고, 낙태죄는 여전히 입법 공백상태에 머물러 있고요, 여성관련 이슈의 정치화 자체가 부진한 상태이죠. 또 2018년 정치권에서 미투운동이 일었을 때 여성 정치인의 활약이 전혀 두드러지지도 못했고요. 비례대표로 할당된 여성 정치인의 어쩔 수 없는 역량 부족 또는 나태함 때문일까요? 이제 이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여성 정치인의 이유있는 항변: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한”

연구자는 비례대표 여성할당제와 관련하여 실제 비례대표를 역임한 여성의원, 초기에 여성할당제를 적극 추진한 여성단체, 학계 전문가 등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할당제가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비례대표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역량’의 불일치

비례대표 여성의원의 주요 역할로는 여성의 현실을 개선할 입법활동과 정치권 내 성평등 문화 정착에 일조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일치된 의견을 보였습니다. 반면, 비례대표 여성의원에게 필요한 역량에서는 의견차이가 뚜렷했죠. 여성단체와 학계 전문가들은 입법 성과를 가장 중요한 역량으로 평가했지만, 여성의원들은 정당 및 남성의원과의 네트워크를 성공의 핵심으로 꼽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입법 성과가 부진하고 대부분 초선에 그치는 여성정치인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죠.

💡 이유있는 침묵: 여성의 편에 설 수 없는 이유

그러나 정치현실을 경험한 여성의원의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례대표의원 경험이 있는 여성 대부분은 외부에서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 역시 그러한 기대에 부응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정계에 입문했지만 결국 재선을 위한 공천 장애물을 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비례대표 의원이 정치활동을 지속하려면 재선을 해야 하고, 재선부터는 지역구로 출마해야 하죠. 그런데 할당제로 정치에 입문한 이들은 대부분 지역구 기반이 약합니다. 그래서 정당의 공천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공천은 입법 능력이 아닌, 정당 내 얼마나 많은 네트워크와 지지를 받고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따라서 정치인으로서 경력을 지속하고 싶다면 여성의제를 포기하고 정당의 요구에 따라야 합니다. 정당 내 의사결정 권한이 주로 기득권 남성 의원에게 있기 때문에 할당제라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도 남성 중심 정치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거죠. 한 인터뷰 참여자는 정당에서 여성의원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성폭력처럼 민감한 젠더이슈에는 여성이 앞장서서 사과하게 하지만, 조치를 취하기 위한 실질적 권한은 주지 않는 것이 정당이 여성의원을 이용하는 방식이라고 말이죠. 이러한 현실은 여성 정치인에게 여성 권리 신장과 정치계 성평등 정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될 수 없습니다.

📌성평등한 정치참여를 이루려면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요?

• 현실적인 측면에서 가장 개선이 시급한 부문은 공천 과정입니다. 여성할당제가 작동할 수 없는 가장 큰 구조적 장애물이니까요. 의정활동의 객관적 평가에 따라 공천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을 통해 공천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 또 하나의 대안책으로 비례대표 연임제도를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연구자는 가장 최근에 비례대표의원을 역임한 사람일수록 여성할당제의 제도적 취지에 대한 이해가 약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는데요. 선거가 거듭될수록 제도가 잘 작동되기는커녕 오히려 목적이 불명확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비례의원 출신이지만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한 의원들은 비교적 여성할당제의 취지와 여성의원으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더 명확히 인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성의원이 실질적 역할을 수행하려면 정치적 지속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정당의 공천을 받지 못해 정치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면, 비례대표의원이 연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겠네요.
  

• 여성할당제 도입 당시 여성운동의 모토는 '비례로 진입하고 살아남아서 정치세력화 하라' 였지만 개인의 입법 역량이 공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현실속에서 비례대표 여성의원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죠. 이상적, 규범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기대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 정치인 당사자뿐 아니라 유권자들의 인식이 함께 동반되어야 합니다. 막연히 여성정치인에게 정치적 역량만 기대하는 차원을 넘어, 여성 정치인의 활약 부진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하죠.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모든 유권자가 함께 참여할 때 가능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