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약’이 불러일으킨 혁명

인류의 역사를 바꾼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이 질문에 ‘피임약’이라고 답합니다. 피임약은 전세계 여성들을 원치 않는 임신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먹는 약을 통해 ‘임신조절’이 가능해진거죠. 이에 따라 여성들의 교육수준과 사회참여가 급속히 증가했고, 인구조절이 가능해지기도 했고요.

‘먹는 약’을 통한 피임은 의사의 전문적인 시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의사-환자의 위계를 변화시킵니다. 또한 여성이 통제할 수 있는(women-controlled) 피임방식으로서, 남성의 의사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여성에게 보다 많은 권한과 통제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의미화 되기도 하죠(Berer,2020).

오늘날 ‘먹는 약’을 통한 임신조절은 낙태, 즉 임신중지(Termination of pregnancy)까지 확장됩니다. 수술을 받지 않고 약물만으로 임신을 종결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흔히 ‘미프진’이라 불리는 ‘유산유도약’은 198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후 많은 나라에서 도입되어 사용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 유산유도약 도입에 대한 논의가 촉발됐습니다. 물론 ‘낙태죄’가 존치하는 현실 속에서 이미 암암리에 불법으로 유통 거래되고 있었고요.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 정부안을 포함하여 국회에 제출된 후속 법안들은 모두 약물을 통한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있죠.

‘먹는 약’을 통한 임신조절의 연속선상에서 ‘유산유도약’은 어떠한 정치적 논쟁을 이끌어낼까요? 이번 폴리버리 레터에서 소개할 논문은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피임약’이 어떻게 의미화 되어왔는지 되짚어보면서, ‘유산유도약’의 사용이 피임 및 임신중지와 관련된 ‘재생산권’ 논쟁에 어떠한 의제를 제시하는지 살펴봅니다. 나아가 ‘먹는 약’을 통한 임신조절이 여성의 재생산권과 관련된 자율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변화가 필요할 지 논의해보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의 ‘먹는 약’의 정치

피임약은 ‘경구 피임약’과 ‘사후 피임약’으로 구분됩니다. 전자는 매일 주기적으로 복용하여 피임 효과를 내는 방식인 반면, 후자는 성관계 후 72시간 또는 120시간 내에 복용하는 방식으로, ‘응급 피임약’으로 취급됩니다.

페체스키(1984)는 특정한 피임법이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 기술 자체보다는 그것의 사용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지적합니다. 한국사회에서 피임약 사용에 대한 의미는 어떻게 구성되어 왔을까요?

저자는 한국에서의 피임 실천은 역사적으로 인구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다뤄져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한국사회에서의 피임은 국가가 목표로 하고 있는 인구 통제를 위해,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 온 영역인 것이죠. 따라서 피임은 국가의 인구 수를 조절하기 위한 문제였지, 개인의 주체적인 결정의 측면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어요. 한국사회에서 피임의 실천은 단지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 간 자식의 숫자 혹은 터울을 조절하는 가족계획의 문제로만 취급됐죠.

💡 "부작용은 별 것 아니니, 걱정 말고 드세요!"

1968년, 한국에 피임약이 처음 보급됐습니다. 인구감소를 위한 정부의 가족계획사업과 함께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이뤄졌죠. 보건소를 통해 무료로 보급 받을 수 있게 하거나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는 방법으로요. 대량 공급을 위해 피임약의 관세를 면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약사법시행규칙 개정령을 통해 예외적으로 의약품 광고를 허용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당시에는 여성들이 피임약에 관한 부작용과 구체적인 복약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일각에서는 여성들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죠.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진지하게 고려되거나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약으로 인한 부작용의 위험보다 출생율 억제라는 국가적 목표가 더 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보급 초기, 피임약은 안전성에 대한 논의가 부재한 채로 여성의 자율성과 건강권보다는 국가의 가족계획사업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습니다.   

💡 "‘오남용’과 ‘생명경시풍조’가 우려돼요"

1989년, 출생율을 억제하는 가족계획사업이 종료됐습니다. 정부 정책은 출산을 장려하는 기조로 변화했어요. 국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장려됐던 피임약 복용이 정책 기조의 변화와 함께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성인용품’으로 취급되거나, ‘오남용’과 ‘안전성’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죠.

특히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과 관련해서는 사실상 피임약이 아니라 ‘낙태약’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어요. 보급 초기 응급피임약은 성폭력 피해를 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처방됐지만, 이러한 약으로 인해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성관계를 조장한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됐습니다. 해당 약이 ‘성문란’과 ‘생명경시풍조’를 조성하여 잘못된 성 윤리관을 형성할 것이라는 주장이죠.

1990년대 이후 오히려 과거보다 경구 피임약의 안전성이 개선됐음에도 불구하고 피임약을 ‘안전하지 않은 약’으로 여기게 된 점에도 주목할 수 있어요. 실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사전피임약은 그 자체로 안전한 약품이다’에 대해 남녀 모두 45%가 긍정의 응답을 하였으며, 나머지 55%는 부정의 응답으로 나타났습니다(김동석 외, 2014). 복약 방법이나, 호르몬제, 부작용 등과 같은 피임약에 대한 구체적 인지 수준 또한 여성임에도 50-60%에 그쳤습니다(김동석 외, 2014). 이는 서구 선진국들의 전체 피임방법 중 피임약의 비율이 20~40%로 높은 반면, 한국은 2.5%정도에 그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어요. 약의 안전성과 여성의 건강권 측면에서 피임약 복용에 대한 알권리 보장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죠.

‘먹는 약’과 '임신중지'

‘임신중지 약’, 흔히  낙태약 또는 미프진이라고 불리는 유산유도약 도입에 관한 논의는 2000년대부터 시작됐습니다. 이후 약 20년간 암암리에 유통되고 거래되어 왔죠. 2019년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은 유산유도약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물꼬를 텄습니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미프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요구가 증폭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임신중지에 대한 규제와 금기, 낙인이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피임약 논쟁의 연장선에서 유산유도약에 관한 논쟁도 ‘안전성’과 ‘오남용’, ‘생명경시풍조’에 관한 문제제기가 반복됩니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여성들을 자신의 몸과 건강을 책임지고 스스로 돌보는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피임약에 대한 접근이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 과연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실질적으로 피임을 할 수 있는 주체로 여겨진 것인 가에 대한 문제제기 입니다. 우리나라 피임 정책 기조는 여전히 미혼모 예방이라는 목적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혼인관계에 있지 않은 여성의 성적 실천 자체를 문제시하는 태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죠. 미혼여성의 임신조절 실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작동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임신조절을 권리로 누릴 수 있었을까요? 유산유도약이 합법화된다고 한들, 재생산 권리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먹는 약' 혁명을 위해 필요한 변화

‘먹는 약’을 통한 임신중지의 가장 큰 장점은, 여성에게 자율성과 재생산에 대한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적은 비용으로 안전하게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스스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는 여성들이 재생산의 주체로 인정받고, 여성들에게 스스로 임신과 출산의 전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함께 주어질 때 가능합니다.

낙태죄의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에도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임신중지에 대한 금기, 사회적 낙인이 강력하게 존재합니다. 저자는 ‘유산유도약’의 도입이 여성의 재생산 권리의 확장으로 의미화되기 보다는, 남몰래 임신중지를 가능케하는 기술로 의미가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임신중지가 사회적 금기가 아닌,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로서 제공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여성이 스스로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요. 또한 저자는 피임과 임신중지를 나누는 이분법적 접근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배란-착상-수정-임신으로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이 점진적·연속적으로 이뤄지기에 어느 시점까지 피임인지, 임신중지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산유도약의 경우 착상 이전과 이후 모두 임신중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약 복용의 결과가 피임이 될 수도 있고 임신중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여성의 신체와 건강에 위해가 덜한 방식으로 임신조절(혹은 출산조절)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논의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피임 장려 정책은 미혼모 방지를 위한 목적에 집중된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성적 실천을 문제시하는 시각을 내포해 피임에 대한 여성들의 실질적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죠. 이러한 접근에서 벗어나 피임 자체에 대한 실천이 실질적으로 확장된 출산조절의 맥락 속에서, 다양한 조절방식에 대한 접근권이 보장되어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