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특별해”라는 말이 위험해질 때.

“나는 네가 참 특별하다고 생각해.”
“네가 다른 애들보다 훨씬 성숙해 보여.”
“이건 너랑 나만의 비밀이야.”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감정이 들 것 같나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나를 유난히 아껴주는 것 같고, 혼자만 알고 싶은 비밀을 건네주며, 나를 특별한 존재처럼 느끼게 해 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주는 특별한 시선, 유대감은 신뢰처럼 느껴질 수 있죠. 그런데 그 감정이 사실은 ‘관계’로 포장된 덫의 시작이었다면요? 오늘은 이런 ‘신뢰’를 무기로 삼는 폭력,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신뢰, 친밀감, 사랑.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이 단어들이 때로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은 관계의 언어를 빌려, 피해자의 감정과 현실을 조작하곤 합니다. 이 글은 감정 조작과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구조를 조명합니다.

사진 출처: BBC NEWS, 2015.11.10, "Grooming in Guernsey due to become a criminal offence" (https://www.bbc.com/news/world-europe-guernsey-34777937)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 폭력”

법학자 Anne-Marie McAlinden(2006)은 그루밍을 단순히 범죄 전 단계로 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정의해요. “그루밍은 피해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공동체와의 신뢰 관계를 설계함으로써, 학대가 가능하고 숨겨지도록 구조를 만드는 과정이다.” (McAlinden, 2006, p. 342)

가해자는 ‘좋은 사람’, ‘믿을 수 있는 어른’으로 다가와 관심을 주고, 감정을 공유하고, 비밀을 나눠요. 이 관계에서 가해자는 어른을 넘어서 좋은 친구이자 멘토로 인식되기도 하죠. 그 사이, 관계 안에서 피해자는 스스로 마음을 열게 되고, 그 관계를 스스로 지키고 싶어지게 됩니다. 그게 자신을 위한 것들인 줄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피해자들은 자주 이렇게 말해요. “그땐 저도 그 사람이 절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먼저 의지했던 것도 맞아요.” 하지만 이 감정은 정말 피해자의 선택이었을까요? 이렇게 만들어진 신뢰는 거절을 어렵게 만들고, 침묵을 유지하게 만들며, 피해자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듭니다.

💡 관계, 위계, 제도의 세 겹 구조

McAlinden은 그루밍이 개인적, 가족적, 제도적이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pp. 344–346). 개인적 관계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특별한 감정, 애정, 보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비밀 공유, 선물, 신체 접촉을 점진적으로 시도하며 정서적 유대를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가해자와 피해자의 감정적 의존도는 높아지게 되고, 피해자는 주변과의 감정적 분리를 심화시킨다는 점입니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이 피해자를 더욱 고립시킬 수 있는 것이죠.

그루밍은 피해자 본인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의 신뢰를 획득함으로써도 가능해지는데요, 부모나 보호자와 신뢰를 쌓아 방심하게 하면서 피해자가 그 관계를 ‘정상’이라 여기도록 만들 수 있죠. “우리 엄마도 저 사람 좋아하는데…”라는 인식을 유도하면서 오히려 피해자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도적 그루밍 (Institutional grooming)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학교나 종교 그리고 연예계처럼 위계가 뚜렷한 곳에서 당연히 믿어도 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죠. 이 공간을 배경으로 가해자는 교사, 지도자, 상사, 유명인 등 ‘사회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침묵이 자연스럽고 거부가 어려운 환경을 조성해 나갑니다. 이렇듯 그루밍이 무서운 이유는 피해자가 스스로의 상황을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위해 주변을 통제해 나간다는 점에 있어요.

“학대는 피해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학대가 가능하도록 만든 사회적 신뢰의 구조에서 발생한다.”
(McAlinden, 2006, p. 343)

💡“내가 착각한 걸까?” – 가스라이팅은 어떻게 관계를 통제할까

이렇듯 그루밍이 피해자와 그 주변까지도 신뢰를 장악해서 관계를 조작하는 기술이라면, 가스라이팅은 피해자의 현실 인식을 흔드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죠. 사회학자 Paige L. Sweet(2019)은 가스라이팅이 단순한 심리 조작이 아니라, 권력 불균형 관계 안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감정 통제 방식이라고 보고 네 가지 단계를 들어 설명했어요.

첫 번째는 현실의 전복이에요. 가해자는 피해자가 경험한 사실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하죠. “그런 일 없었어”, “그건 네 착각이야.” 피해자가 느낀 분명한 감각이나 상황조차 “틀렸다”고 말하며, 피해자는 점차 자신의 기억과 인식을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감정의 폄하입니다. “넌 너무 예민해”, “그게 왜 문제야?” 같은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피해자가 느끼는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별일 아닌 것”으로 만들면서, 감정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낙인찍히죠. 이로써 피해자는 감정을 말하는 것 자체를 주저하게 돼요.

세 번째는 문제의 전가입니다. 가해자는 종종 피해자의 책임을 끌어오며 말합니다. “넌 항상 피해자처럼 굴어”,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지.” 그 말은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피해자는 스스로를 탓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적 고립입니다. “넌 너무 복잡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도 널 힘들어해. 이런 말들은 피해자가 자신이 외면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끊게 만들어요. 이 과정은 피해자를 점점 더 고립시키고, 가해자와의 관계에만 의존하게 만듭니다.

“가스라이팅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감정, 감각, 기억까지 의심하게 된다.”
(Sweet, 2019, p. 195)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에 숨겨진 젠더 위계

가스라이팅은 단순히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것은 피해자가 현실을 부정하고 감정을 불신하게 만들며, 결국 자신의 감각과 감정, 기억을 의심하게 만드는 구조적 조작 행위인 것이죠.

Sweet는 가스라이팅이 특히 젠더적 위계 속에서 자주 발생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사회가 여성에게 “감정적이다”, “예민하다”는 낙인을 반복해온 구조 안에서, 가스라이팅은 여성의 감정 자체를 불신하게 만드는 기술로 작동해요. 특히 성인–미성년자, 남성–여성, 상급자–하급자처럼 사회적으로 위계화된 관계에서 더 쉽게 작동하는 것이죠.

여성 피해자는 자신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검열하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 침묵하는 쪽을 택하게 됩니다. 가스라이팅은 감정을 사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동시에, 그 감정의 권위, 성차, 위계와 같은 공적 맥락을 지워버립니다. 결국 피해자는 “내가 민감한 걸까?”, “내가 예민한가?”라는 자기검열에 빠지고, 더 깊은 침묵으로 들어가게 돼요. 이 과정은 반복적으로 작동하면서, 피해자가 “문제가 나에게 있다”고 믿게 만들고, 가해자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의 연결고리

McAlinden이 말하는 그루밍이 ‘신뢰의 설계’라면, Sweet이 말하는 가스라이팅은 ‘현실 인식의 조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작동하곤 하죠. 그루밍이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를 만들고, 가스라이팅은 그 관계를 통해 피해자의 감정을 통제하죠. 이 두 폭력은 모두 “그 사람은 날 아껴준다”는 감정으로 시작해, “내가 잘못했나 보다”는 감정, 피해자의 자기검열 속에서 끝납니다.

두 연구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이 폭력이 ‘감정’이라는 언어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가해자가 만들어낸 관계 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으며 의존하고. 외부와는 고립된 채, 조작된 동의를 진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가해자는 “합의된 관계”라고 주장하고, 사회는 피해자에게 “왜 싫다고 하지 않았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질문들은 바뀌어야만 해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묻기보다, “왜 말할 수 없는 구조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가스라이팅은 피해자에게 “너의 문제야”라는 메시지를 반복함으로써, 피해자가 자신이 갇힌 구조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 결과, 피해자는 스스로 낙인을 떠안고, 폭력에서 도망치기보다 남아 있게 됩니다.

📌 침묵은 무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