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침묵, 이제 그만!

직장 혹은 조직 내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은 사회적 문제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한국은 성희롱 및 성폭력 문제를 뿌리뽑고자 이에 대한 의무교육 및 처벌 규정, 그리고 신고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는 국가인데요.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성희롱 및 성폭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중요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폴리버리 레터에서는 성희롱 문제를 피해자-가해자의 개인적인 구도에서 바라보는 것을 넘어 구조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논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희롱은 구조적 폭력이야!

저자는 성희롱을 비롯한 성폭력을 개인의 일탈이나 부도덕함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 아닌, 불공정한 사회구조로 인해 발생한 폭력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이것을 “구조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바라봅니다.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 은 노르웨이의 사회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제시한 개념인데요, 갈퉁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라고 보지 않아요. 그는 특정한 사회구조 혹은 제도가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삶의 가능성을 제한할 때, 이 또한 폭력이라고 해석하며, 이것이 바로 구조적 폭력입니다. 빈곤, 인종차별, 교육 불평등, 성차별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이 구조적 폭력에 해당되는데요, 성희롱 및 성폭력 역시 이 문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핵심은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구조적으로 고착화된 억압”에 있습니다. 즉, 누군가의 직접적인 공격 없이도, 사회와 조직의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이 피해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희롱 및 성폭력 사건들에도 사회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단순히 개인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성희롱 및 성폭력  근절이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단순 법과 제도로는 부족한 이유: 침묵의 악순환

저자는 성희롱 사건들을 구조적으로 바라볼 때, 성희롱이 많은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지위가 높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조직 내에서 영향력 있는 중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지적해요. 그리고 이때, 그 조직이 소수자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방식으로 운영될수록, 계층간 소통이 어려운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을수록, 성희롱 사건이 발생할 때 조직 구성원들은 침묵하게 되기 쉽다고 봅니다. 

이 침묵 행동(silence behavior)은 조직 구성원이 조직 내의 문제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침묵하기를 선택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로, 이런 침묵 행동은 성희롱 가해자에게 우호적이거나, 근본적인 피해상황 자체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 그들이 입을 열기 어려운 이유

저자는 많은 경우 침묵 행동은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성희롱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지적합니다.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한 “2021년 성희롱 실태조사”에서 직장내에서 성희롱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76.6%가 성희롱 피해를 입었을 당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것을 선택했다고 응답했어요.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43.6%)했거나, 화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는(33.0%) 식으로 말이에요.

이들이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불신, 그리고 피해사실을 알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드러나 2차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에요. 조직에 피해를 주는 예민한 사람으로 왜곡된 낙인이 찍혀 괴롭힘, 혹은 평가의 불이익을 받게 될까 두려운 것이죠. 

💡 한 사람의 침묵 → 모두의 침묵

저자는 침묵에도 전염성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첫번째 피해자의 침묵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선택일지 모르지만, 이 침묵의 태도는 조직 내에서 점차 풍토로 확산되어 간다는 것이죠. 한 사람이 침묵하면 다른 피해자나 목격자도 따라서 침묵하게 되고, 이렇게 침묵은 조직 안에 점점 깊이 스며듭니다. 결국 ‘침묵의 카르텔’이 만들어지고, 피해자는 점점 고립되며, 가해자는 더욱 대담해지겠죠. 이런 상황이 된다면 조직 전체의 문제 해결 의지 역시 점점 약해지고, 성희롱 사건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조직의 문화와 구조적 문제’로 뿌리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 침묵을 깨고 조직을 바꿔보자!

그렇다면, 이런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리고 조직문화 자체를 변화시켜 성희롱 근절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는 개념에 주목합니다. 회복적 정의란 피해자, 가해자,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새로운 약속과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아니, 지금 피해자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거야?

하지만 회복적 정의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 몇몇 사람들은 그 개념을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어요.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용서를 할 생각이 없는데, 용서하고, 이제 그만 가해자와 화해하라며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말이에요.

💡 오해야!!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우려에 대해 회복적 정의는 화해를 강요하거나, 가해자의 잘못을 덮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물론 회복적 정의는 피해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고 당사자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발적 동의가 있는 상황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죠. 처음에는 동의를 해서 실행이 되었다고 하여도 실행 과정 중간에 마음이 바뀌면, 당사자들은 언제든지 참여를 종료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UN 형사사법에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 사용을 위한 기본원칙 (UN Basic Principles on the Use of Restorative Justice Programmes in Criminal Matters) 제7조에서도 똑같이 회복적 절차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동의하에서만 사용되어야 하고, 그 동의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으며, 부과되는 의무 역시 합리적이고 적정한 수준에 그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공동체의 힘으로 다시 연결하기

📌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 먼저 조직 내에서 직위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어요. 조직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은 성희롱 문제에 침묵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성희롱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죠. 구성원들에게 문제를 제기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신뢰를 심어주고, 그들이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조직 문화가 갖춰져야, 구성원들이 보다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예요. 회복적 프로그램과 별도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우려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비공개 상담, 법적 보호, 그리고 피해자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도 조직에 대한 안전감과 신뢰를 회복하는 좋은 방법일 거예요.
• 지난 폴리버리 레터에서는 성희롱 예방책으로서의 근로 ‘근로감독제도’에 대해서도 소개한 적이 있어요(💌지난 레터 보러가기). 이것은 성희롱을 비롯한 직장내 괴롭힘 근절을 위해 근로 감독관을 고용하는 제도인데요,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는 않다는 의견이 많아요. 특히 성희롱과 같은 개인적 문제로 취급되는 문제들에서는 근로감독관이 온전히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데요, 성희롱 문제를 노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업장 문제로 환원하기 위한 시도가 필요해 보여요. 그 외에도 근로 감독의 독립성,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 내부·외부의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노력 역시 필요하고요.
• 더불어, 모든 구성원이 회복적 정의의 개념과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갖출 필요가 있어요. 회복적 정의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형식적 교육이 아닌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한 정교한 교육이 필요할 거예요.
• 지금까지 많은 조직들이 성희롱 사건에 대해 징계와 처벌 중심의 규정을 마련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성희롱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어렵습니다. 징계뿐만 아니라, 공동체 중심의 문제 해결 과정 역시 공식 규정에 포함한다면, 도움이 될거예요. 회복적 정의를 바탕으로 한 문제해결 절차,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 피해자 보호 체계 등을 명문화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그 절차를 숙지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할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