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전환 #성별화된 노동 #고령화 #가족구조

• 은퇴는 무엇인가: 왜 누군가는 일하고, 누군가는 은퇴하는가
• 은퇴의 경로는 어떻게 성별화되는가
• 일은 ‘선택’일 때 의미가 있다

은퇴는 생애의 정해진 한 시점에서 일을 그만두는 것으로 단순화될 수 없습니다. 은퇴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적 결과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은퇴와 재취업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죠.

과도기적 전환은 종종 가교 일자리(Bridge employment)를 통해 나타납니다. 가교 일자리는 정규직 경력과 완전 은퇴 사이에 위치한 중간 단계의 노동 형태로, 퇴직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유급 노동을 지속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전환은 단순히 ‘일을 더 한다’는 의미를 넘어, 노후로의 이행 과정에서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삶의 조정 방식을 보여줍니다.

과거에는 은퇴 후 계속 일하는 모습이 건강하고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고학력 남성에게서 주로 나타난다고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경력의 불안정성, 낮은 연금 자격, 가족 내 돌봄 부담을 지닌 이들도 반복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은퇴는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어떤 일자리에서 일해왔는지, 지금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은퇴가 가능한지, 또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을지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건강이 나쁘거나, 가족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오래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수 없을 수 있어요. 반대로, 은퇴 후 연금에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직업이라면, 생계를 위해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겠죠.

결국 은퇴는 단순히 ‘일을 그만두는 시점’이 아니라, 그동안 어떤 경로를 따라 살아왔는지, 어떤 불평등이 쌓여왔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전환점이에요. 일자리의 특성, 건강 상태, 돌봄의 책임, 연금이나 사회제도의 유무 같은 조건들이 교차하면서 누구는 일찍 은퇴하고, 누구는 은퇴조차 어렵게 만듭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퇴는 단순한 개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생애 전반의 경험이 구조화된 결과물입니다. 특히, 성별에 따라 생애경로 자체가 뚜렷하게 다르게 형성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은퇴의 조건 역시 성별화된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노동 경로와 직업 경험’ 그리고 ‘가족 구조와 세대 간 지원’ 이라는 두 갈래로 은퇴 전환이 어떻게 다르게 형성되는지를 분석하였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경력 특성과 은퇴 전환 간의 연관성은 남성에게서만 유의하게 나타났습니다. 남성은 직업 계층, 자영업 여부, 근속 기간 등 경력의 누적 구조에 따라 은퇴를 미루는 경향이 결정되었는데, 육체노동자나 자영업자로서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경우, 생계를 위해 노동시장을 쉽게 떠날 수 없는 구조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성의 경우 이와 같은 경력 요인들이 은퇴 전환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성은 주로 가족 구조와 비공식적 돌봄 책임, 그리고 자녀로부터의 지원 여부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성인 자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여성일수록 노동시장에 복귀하지 않고 은퇴 상태를 유지하는 경향이 뚜렷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남성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생애 후반 노동 참여 결정이 남성에게는 직업적 경력의 연속성에 기반해 있고, 여성에게는 삶의 후반기 가족 구조와 자원의 분포에 따라 제한되거나 가능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노년기의 경제적 자율성은 남성에게는 연금과 고용 안정성을 통해, 여성에게는 가족 내부의 지원망을 통해 형성되고 있는 셈입니다.

‘은퇴했으면 이제 쉬어야지.’

은퇴 후에도 일하는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이처럼 단순하거나 일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계속 일하는 것은 종종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혹은 일이 습관이 돼서 쉬지 못하는 모습으로 해석되고 하죠. 노인의 노동은 여전히 ‘정상적인 은퇴’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상태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이 다일까요?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합니다.

많은 노인들은 일을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활력, 사회적 연결, 존엄의 감각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통계청의 2024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장년ㆍ고령층(55~79세) 중 약 70%는 계속해서 일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미 일하고 있는 이들 중에서는 무려 93.2% 계속 근로를 희망했고, 희망하는 노동 상한 연령은 평균 73세에 이르렀습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2023년 조사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노인일자리 사업 참여자 중 49.4%는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32.8%는 건강 유지, 여가·친교, 사회 기여 등 비경제적 이유로 일한다고 응답했습니다. 노인의 노동은 점점 더 복합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 일이 정말로 ‘선택된 것’이었을까요?

연금이 부족하고, 자산이 충분하지 않으며, 가족이나 국가로부터의 지원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됩니다. 특히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족 구조에 의존해온 여성들, 사회 제도에서 소외된 육체 노동자나 자영업자 등은 ‘선택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은퇴 이후에도 계속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일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일해야만 하는’ 걸까요? 진정한 의미의 보람과 성취는, 그 일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택되었을 때에만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