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부부강간 #동의 #비동의강간죄 #행위능력

• 아내는 왜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을까

• 강간죄는 오랫동안 ‘아내’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 아직도 남은 질문들: 동의를 기반으로 판단한다는 것

• 마무리하며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비동의 강간법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요. 왜 아직도 강간의 기준이 ‘동의’가 아니라 ‘폭행·협박’인지, 왜 피해자의 말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한지에 대한 질문도 이어지고 있죠. 이 논의는 흔히 최근의 정치적 쟁점처럼 다뤄지지만, 사실 그 뿌리는 훨씬 더 오래된 법의 역사와 맞닿아 있어요. 강간법은 단지 성범죄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어떤 존재로 상정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 질문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아내강간’이 언제, 어떻게 인정되었는 가라는 문제예요. 

출처: 피해자 진술만 있어도 ‘비동의 강간죄’ 유죄? 그렇지 않습니다. (한겨례, 2025)

강간죄는 오랫동안 ‘아내’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한국 형법에는 오래전부터 강간죄가 존재했어요. 하지만 그 강간의 피해자는 암묵적으로 ‘아내가 아닌 여성’이었어요.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법의 판단 대상이 아니었고, 혼인 관계 안에서의 강제적 성관계는 오랫동안 ‘강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죠.

 왜 이런 인식이 가능했을까요? 많은 설명은 이를 가부장적 문화나 성 역할 규범의 문제로 돌려왔어요.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문제는 법의 구조 안에서 설명되어야 해요. 아내강간이 인정되지 않았던 이유는, 법이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내를 ‘거부할 수 있는 법적 주체’로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이에요.

 이를 다룬 하민경(2018)의 논문은 아내강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의외의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요. 바로 ‘처의 행위능력’이라는 개념이에요. 행위능력이란, 법적으로 의미 있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해요. 계약을 체결하고, 재산을 관리하고, 법적 분쟁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전제이죠. 그런데 근대 법제 초기에 여성, 특히 혼인한 여성은 이 행위능력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어요. 아내는 독립적인 법적 주체라기보다 남편의 보호와 지배 아래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죠. 이 구조 속에서 아내의 의사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가족 내부의 문제’로 처리됐어요. 성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요. 그래서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동의 여부를 묻는 대상이 아니었어요. 혼인이라는 제도를 통해 이미 포괄적으로 허락된 관계로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논문은 이 점을 분명히 해요. 아내강간이 성립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내가 항상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동의하지 않음’이 법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요.

 중요한 점은, 이 구조가 여성을 전혀 보호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법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상정했어요. 다만 그 보호는 언제나 타인의 판단을 전제로 한 보호였죠. 여성은 스스로 결정하고 거부하는 존재라기보다, 지켜져야 할 존재, 관리되어야 할 존재로 위치 지어졌어요. 그 결과 여성의 의사는 폭행이나 협박 같은 외부적 징표가 있을 때만 비로소 법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었죠. 이 구조 속에서 아내의 침묵이나 저항 불가능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애초에 아내는 “동의했는지 아닌지”를 따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2013년, 비로소 아내는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아내 강간의 최조 인정, 2013년 대법원 판결

 아내강간이 인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점진적인 이동이었어요. 논문은 이 변화를 여성의 성적 권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법적 지위 전반의 변화로 설명해요. 여성이 혼인 이후에도 재산을 소유하고, 소송을 제기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점차 인정되면서, 그 변화가 서서히 성적 자기결정권의 영역으로 확장된 거죠. 즉, 아내강간 인정은 성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바뀌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여성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재위치시키는 법적 과정의 산물이었어요. 이 점은 아주 중요해요. 강간법의 변화는 도덕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이 누구를 주체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였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이 긴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에요.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처음으로 혼인 관계에 있더라도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성관계는 강간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어요. 이 판결의 의미는 단순히 “아내강간이 처벌 가능해졌다”는 데 있지 않아요. 논문은 이를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로 읽어요. 이 판결은 결국 아내를 성적 의무를 포괄적으로 부담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한 사건이었어요. 즉, 법이 처음으로 “아내도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승인한 순간이었던 거죠.

아직도 남은 질문들: 동의를 기반으로 판단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판결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해요. 아내강간은 인정되었지만, 강간을 판단하는 기준은 여전히 폭행·협박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즉, 아내를 포함하여 여성은 이제 법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 거부는 여전히 강하게 입증되어야만 의미를 갖는 구조에 놓여 있어요.

 여성의 말은 여전히 증거로 인정받기에 충분하지 않고, 여성의 침묵은 해석의 여지로 읽혀버려요. 그래서 이 논문은 아내강간 인정 판결을 분명한 진전이면서도 동시에 미완의 변화로 평가해요. 즉, 여성은 동의하지 않았음을 스스로의 몸에 남은 상처로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는 그대로 놓여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동의’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현재의 강간 판단 구조에서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을 경우, 혹은 상황을 즉각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을 경우, 그 침묵이 쉽게 동의로 해석돼요. 그러나 그 침묵은 정말 동의였을까요? 아니면 공포, 혼란, 관계의 압력, 혹은 이후의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요? 우리는 조금만 상상해보아도 그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어요. 아내강간 인정이 여성을 ‘거부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첫걸음이었다면, 비동의 강간 논의는 여성을 ‘말한 그대로 신뢰받을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다음 단계의 질문이에요.

마무리하며

법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비동의 강간 논의가 나올 때마다, 그 반대 논리는 반복돼요. “무고의 위험”, “성적 자기결정권의 과도한 형사화”, “사적 영역의 침해”등이 그 주를 이루어요. 김주현(2024)은 이런 논의가 결국 법이 무엇을 더 신뢰하는지를 드러낸다고 말해요. 여성의 말보다, 기존의 판단 기준과 안정성을 더 신뢰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이 논문은 비동의 강간 논의를 단순히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법이 어떤 불안을 관리하려 하는가의 문제를 읽어낼 수 있게 해주죠.

📌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